루트비히 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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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트비히 토마는 1867년 독일 오버아머가우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변호사였다. 그는 바이에른 농촌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사회의 위선과 부조리를 풍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특히 풍자 잡지 《짐플리치시무스》의 편집자로 활동하며 사회 비판적인 글을 썼다. 초기에는 좌파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반유대주의적인 기사를 익명으로 기고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토마는 1921년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오늘날에도 바이에른 지역에서 그의 이름을 딴 제품과 학교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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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토마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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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카를 하인리히 루트비히 토마 |
출생 | 1867년 1월 21일, 오버바이에른 주 트라운슈타인 |
사망 | 1921년 8월 26일 (54세), 테게른제 근처 로트아흐의 자신의 집 |
국적 | 독일 |
직업 | 작가, 출판업자, 편집자 |
상세 정보 | |
장르 | 소설, 단편 소설, 시, 극, 편지 |
영향 | 하인리히 하이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부슈 |
영향을 받음 | 에리히 케스트너 외된 폰 호르바트 |
배우자 | 마리안네 하우저 (결혼: 1917년) |
대표작 | |
작품 | 농부 안톤 신성한 질주 필기사 젊은 날의 장난 이야기 문라이트 도덕 조세핀 |
2. 생애
루트비히 토마는 1867년 오버아머가우에서 숲지기 막스 토마의 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3][4][5] 그의 증조부 요제프 폰 토마(de)는 바이에른 임업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종신 귀족으로 승격되었다.[3][4]
어린 시절은 티롤 국경 근처 이자르강 유역의 포어더리서에 있는 숲지기 숙소에서 보냈으며, 유모 빅토리아 프뢰스트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6] 1874년, 토마가 7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족은 빈곤한 상태에 놓였다.[8]
토마는 란츠툴에 있는 삼촌에게 맡겨져 초등학교와 라틴어 학교를 다녔으나, 아버지의 죽음과 가족과의 헤어짐은 학업에 영향을 미쳤다. 1876년, 어머니는 킴제호의 프리엔 암 킴제에 있는 여관을 임대하여 운영했다.[10] 토마는 기숙 학교와 가족의 "목가적인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이후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 1886년에 ''Maturität'' 시험을 통과했다.[14]
토마는 임학자가 되기를 원해 아샤펜부르크에서 임학을 공부했지만 1년 만에 중퇴했다. 이후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와 에를랑겐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890년 법률 사무원 자격증을 받았다.[17] 트라운슈타인에서 법률 인턴으로 일하면서 ''정당방위 이론''을 주제로 논문을 썼지만, 박사 학위 논문을 인쇄하지 않아 박사 학위 증서를 받지 못했다.[18]
1895년, 단편 소설 "Der Truderer"를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99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매각하고 풍자 주간지 ''짐플리치시무스''의 정식 편집자가 되었다.[24] 1906년에는 헤르만 헤세와 함께 잡지 《마르츠》의 편집자가 되었다.
1907년, 필리핀 출신의 무용가 마리에타 디 리가르도와 결혼했지만, 성격 차이로 1911년에 이혼했다.[1] 1908년, 테게른제에 있는 "아우프 데어 투프텐"(Auf der Tuften)이라는 집으로 이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토마는 좌파 자유주의 성향이었으나, 전쟁 발발 후 열렬한 애국주의자로 변모했다. 의무병으로 자원입대했으나 이질에 걸려 군 복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35]
전쟁 패배 이후, 토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1920년부터는 《미스바허 안차이거(Miesbacher Anzeiger)》에 반유대주의적이고 극우적인 내용의 글을 익명으로 기고했다.[37]
토마는 1921년 8월 26일 테겔른제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로타흐-에게른의 성 라우렌츠 교회 교구 묘지에 묻혔다.
2. 1. 출생과 성장
루트비히 토마는 1867년 오버아머가우에서 숲지기 막스 토마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토마 사이에서 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3][4][5] 그의 증조부 요제프 폰 토마(de)는 바이에른 임업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종신 귀족으로 승격되었다.[3][4]어린 시절은 티롤 국경 근처 이자르강 유역의 포어더리서에 있는 숲지기 숙소에서 보냈으며, 유모 빅토리아 프뢰스트(Viktoria Pröbstl)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6]
1874년, 토마가 7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족은 빈곤한 상태에 놓였다.[8] 어머니는 일곱 자녀를 홀로 키웠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동료인 카를 데크리니스(Karl Decrignis)를 후견인으로 두었다.[9] 토마는 란츠툴에 있는 삼촌에게 맡겨져 초등학교와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9] 아버지의 죽음과 가족과의 헤어짐은 학업에 영향을 미쳐, 그는 어려운 학생이었다.
1876년, 어머니는 킴제호의 프리엔 암 킴제에 있는 여관을 임대하여 운영했다.[10] 토마는 기숙 학교와 가족의 "목가적인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1877년에는 도나우강의 노이부르크에 있는 연구 세미나 기숙 학교로 옮겼고, 부르크하우젠, 알퇴팅의 쿠어퓌르스트-막시밀리안-김나지움 부르크하우젠에서 1년을 반복해야 했다.[9]
1879년, 토마는 빌헬름김나지움으로 옮겼으나, 1885년까지 뮌헨에서 1년을 반복해야 했다.[9] 1883년 가족은 트라운슈타인으로 이사했다.[13] 1884년, 카를 데크리니스가 사망한 후, 숲지기 루드비히 폰 레스펠트가 토마 형제의 후견인이 되었다.[9]
1885년, 레스펠트는 토마가 란츠후트의 김나지움 마지막 학년에 입학하도록 도왔다.[14] 란츠후트에서 토마는 1886년에 ''Maturität'' 시험을 통과했다.[14]
2. 2. 학업과 법조인의 길
토마는 임학자가 되기를 원해 1886/87년 겨울 학기에 아샤펜부르크에서 임학을 공부했지만 1년 만에 중퇴했다. 아샤펜부르크 재학 중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임학 단체인 코르 휫베르티아에 가입했으나, 멘수어에 참가하지 않아 불명예스럽게 제적되었다.[15]1887/1888년 겨울 학기에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로 옮겨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코르 수에비아 뮌헨의 회원이 되었다.[16] 뮌헨에서 두 번의 결투에 참가했지만 매번 방어적인 입장이었고, 슈미스 ("결투 흉터")를 얻지 못하고 코르 수에비아에서 제적되었다.[17] 동료 학생의 조언으로 여름 학기에 에를랑겐 대학교로 옮겨 1890년 8월 1일에 법률 사무원 자격증을 받았다.[17] 마틴 클라우스는 이러한 실패와 학교 변경은 토마의 성격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평가했다.
토마는 ''추억''에서 뮌헨과 프리에에서의 학창 시절은 자세히 묘사했지만, 대학교에서의 경험은 "평범한 것이어서 묘사할 필요가 없다"라며 간략하게 다루었다.
1890년부터 트라운슈타인에서 법률 인턴으로 일하면서 형법 교수 칼 뤼더와 함께 ''정당방위 이론''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1890년 12월 6일 구두 시험에 합격했지만, 박사 학위 논문을 인쇄하지 않아 박사 학위 증서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그가 박사 학위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18]
2. 3. 작가로서의 성공
1895년 4월, 토마의 단편 소설 "Der Truderer"가 문학 부록 ''Sammler''에 게재되면서, 그는 바이에른 농촌의 일상을 다룬 산문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후 정치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며, 10월에는 바이에른 SPD의 정당 회의와 농업 정책에 관한 기사를 ''Augsburger Abendzeitung''에 기고하여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개혁 노력을 비판하기도 했다.[19]1897년, 다하우 예술가 식민지에서 활동하던 아돌프 횔첼과 ''Jugend''에서 성공을 거둔 브루노 파울은 토마의 첫 단편 소설집 ''Agricola: Bauerngeschichten''("농민 이야기")의 삽화를 맡았다. 이 책은 파사우의 발트바우어 서점에서 출판되었다.[22] 같은 해, 파울은 알베르트 랑겐이 창간한 풍자 주간지 ''짐플리치시무스''로 옮겨갔고, 토마는 "Odeonsplatz"의 카페 헤크에서 랑겐의 직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1898년, 토마는 첫 번째 원고를 ''짐플리치시무스''에 보냈고, 출판사와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1899년 9월, 토마는 변호사 사무실을 매각하고 ''짐플리치시무스''의 정식 편집자가 되었다.[24] 1903년에는 그래픽 아티스트 이그나티우스 타슈너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28] 소설 《로칼반》의 성공으로 출판사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재정적 안정을 얻은 토마는 운터바이커트쇼펜에서 알베르트 랑겐과 함께 사냥터를 임대하고,[29] 동료들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등[30] 상류층 생활을 즐겼다. 1906년에는 헤르만 헤세와 함께 잡지 《마르츠》의 편집자가 되었다.
2. 4. 결혼과 이혼
1907년, 루트비히 토마는 필리핀 출신의 무용가 마리에타 디 리가르도(1880–1966)와 결혼했다.[1] 마리에타 디 리가르도는 당시 시대에는 진취적인 여성이었다.[1]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인해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1] 마리온은 지루함을 느껴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1911년에 이혼했지만, 두 사람은 친구로 남았다.[1]2. 5. 테게른제에서의 생활
1908년, 루트비히 토마는 테게른제에 있는 "아우프 데어 투프텐"(Auf der Tuften)이라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 해 초연된 그의 희극 ''도덕''(Moral)은 그의 가장 큰 성공작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연극에서 그는 도덕 협회(''Sittlichkeitsverein'')의 대표자를 등장시켰는데, 그는 그러한 협회의 원칙에 어긋나는 심각한 위반을 저질렀다. 대표자는 "도덕적이 되는 것은 내 방에서 혼자서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교육적 가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공공연히 도덕적 원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족에게, 국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라고 말했다.[33] 같은 작품에서, 이 도덕 사회의 회장은 "아쎄서 씨, 부부가 결혼 생활에서 거짓말을 멈추면, 그들은 헤어집니다."라고 진술한다.[34]2. 6. 제1차 세계 대전과 정치적 변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토마는 좌파 자유주의 성향으로 사회, 교회, 국가를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열렬한 애국주의자로 변모했다. 의무병으로 자원입대하여 1915년 바이에른 사단 소속으로 동부 전선의 갈리치아에 배치되었으나, 이질에 걸려 군 복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35] 1917년 토마는 ''미스바허 안차이거''에 전쟁 채권 구독을 독려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타협 없는 승리를 옹호하는 독일 조국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36]전쟁 패배 이후, 토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1918년 여름, 그는 유대인 가문 출신의 마이디 리버만 폰 발렌도르프(1883–1971)를 만나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녀의 남편이 이혼을 거부하여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7. 미스바허 안차이거 기고
1920년부터 토마는 지역 신문 《미스바허 안차이거(Miesbacher Anzeiger)》에 주로 반유대주의적이고 극우적인 내용의 글을 익명으로 기고했다.[37] 그는 베를린 정부와 사회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기사를 썼으며, 유대인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38] 그는 베를린을 "오리 덤프"와 "갈리시아 유대인 둥지와 뉴욕 범죄 지구의 조합"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39]토마는 쿠르트 아이스너를 "유대인 돼지"라고 부르며 그의 살해를 "처형"이라고 묘사했고,[36] 유대인 출판업자 루돌프 모세를 "곱슬머리에 진보적인 가위질을 하는 악당"이라고 모욕했으며, 쿠르트 투홀스키를 "작은 갈리시아 불구자"라고 비난했다.[36] 1921년 3월 16일 기사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결성된 자위 단체의 해산을 위한 국회 법률 통과를 언급하며 "우리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갈리시아 유대인 한 명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를 관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때릴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37]
뮌헨 국립 사회주의 역사 문서 센터의 루이스 마르코프스키는 토마가 "교묘한 문체로 조잡한 내용을 나치 선전과 연결하여 사회적으로 용인되게 만들었다."라고 평가했다.[37]
2. 8. 사망
토마는 1921년 8월 6일 뮌헨에서 위 수술을 받았다. 1921년 8월 26일 테겔른제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상당한 재산과 수수료, 로열티의 대부분을 마이디 폰 리버만에게 유증했다. 이혼한 아내 마리온, 여동생 카타리나 휅너와 베르타 추어베스텐, 남동생 페터 토마는 각각 20만 마르크를 받았으며, 페터 토마는 추가로 연간 2,000 마르크의 종신 연금을 받았다.루트비히 토마는 테겔른제 호수 근처 로타흐-에게른의 성 라우렌츠 교회 교구 묘지에 묻혔다. 오늘날 그의 묘는 오랜 친구였던 작가 루트비히 강호퍼와 그의 연인 마이디 폰 리버만의 묘 사이에 있다.
3. 주요 작품 및 활동
루트비히 토마는 1899년부터 풍자 잡지 짐플리치시무스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사회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다. "페터 슐레밀"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쓰는 등[24]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1906년에는 헤르만 헤세와 함께 잡지 《마르츠》의 편집자가 되었다.
토마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출판 연도 |
---|---|
시골 열차 | 1901 |
개구쟁이 이야기 | 1905 |
안드레아스 푀스트 | 1906 |
프리다 고모 | 1907 |
도덕 | 1909 |
천국의 뮌헨 사람 | 1911 |
요제프 필서의 서신 교환 | 1912 |
3. 1. 초기 작품
토마는 1903년에 그래픽 아티스트 이그나티우스 타슈너를 만나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28] 소설 《로칼반》의 성공으로 토마는 출판사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재정적 걱정에서 벗어나 상류층 생활을 즐겼으며, 다하우 근처 운터바이커트쇼펜에서 알베르트 랑겐과 함께 사냥터를 임대하기도 했다. 랑겐이 임대료의 절반을 지불했지만, 사냥은 주로 토마가 사용했다.[29] 1903년 3월과 4월에는 동료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로마까지 갔다.[30] 그는 조롱조의 이야기 《성 히에스》를 썼고, 첫 번째 소설 《안드레아스 푀스트》를 쓰기 시작했다.1906년, 토마와 헤르만 헤세는 잡지 《마르츠》의 편집자가 되었다.
토마의 초기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출판 연도 |
---|---|
시골 열차 | 1901 |
개구쟁이 이야기 | 1905 |
안드레아스 푀스트 | 1906 |
프리다 고모 | 1907 |
도덕 | 1909 |
천국의 뮌헨 사람 | 1911 |
요제프 필서의 서신 교환 | 1912 |
3. 2. 짐플리치시무스 활동
토마는 1899년부터 풍자 잡지 짐플리치시무스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사회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다. 그는 여러 필명을 사용했는데, 주로 "페터 슐레밀"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썼다.[24] 1906년에는 헤르만 헤세와 함께 잡지 《마르츠》의 편집자가 되었다.3. 3. 후기 작품 및 논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트비히 토마는 정치적으로 보수, 극우화되면서 논란이 되는 글들을 발표했다. 특히 《미스바허 안차이거》(Miesbacher Anzeiger)에 기고한 글들은 반유대주의적이고 사회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비판을 받았다.[37] 그는 쿠르트 아이스너를 "유대인 돼지"라고 부르는 등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며, 아이스너의 암살을 "처형"이라고 묘사했다.[36]토마는 루돌프 모세를 "곱슬머리에 진보적인 가위질을 하는 악당"이라고 모욕했고, 쿠르트 투홀스키를 "작은 갈리시아 불구자"라고 비난했다.[36] 1921년 3월 16일 《미스바허 안차이거》에 "모든 베를린 정부와 유대인 돼지에게 보내는 방송"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결성된 자위 단체의 해산을 위해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갈리시아 유대인 한 명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를 관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때릴 것이다."라고 썼다.[37]
뮌헨 국립 사회주의 역사 문서 센터의 루이스 마르코프스키는 토마가 "교묘한 문체로 조잡한 내용을 나치 선전과 연결하여 사회적으로 용인되게 만들었다"라고 평가했다.[37]
4. 작품 세계와 평가
토마는 초기에는 사회 비판적인 작가로 평가받았지만, 후기에는 극우적인 성향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20~1921년 ''미스바허 안자이거''에 실린 그의 기사를 바탕으로, 1989년 ''슈피겔''은 토마가 분노에 찬 반유대주의자가 되었고, 히틀러의 선구자로 발전했다고 비난했다.[39]
변호사 오토 그리치네더는 루트비히 토마의 삶에서 어두운 에피소드로 뮌헨-슈타델하임에서 6주간의 수감(1906년)과 "토마가 말년에 ''미스바허 안자이거''에 기고한 극도로 반유대적이고 저속한 반민주적 에세이"를 강조한다.[41] 그는 또한 토마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한 적이 없음에도 스스로 "닥터 루트비히 토마"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자신을 박사라고 부르게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41]
4. 1. 문학적 특징
루트비히 토마는 자신의 작품에서 당시 만연했던 위선적인 도덕성을 드러내려 했다. 그는 또한 부르주아 계층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Pickelhaube' 군국주의를 가진 광적인 프로이센주의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는 바이에른 왕국 시대의 지방주의와 성직자 정치를 혐오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 ''요제프 필서의 서간문''에 잘 나타나 있다.[39] 그의 유머와 풍자로 양념된 이야기나 상부 바이에른의 시골 및 소도시 환경을 그린 그의 단막극은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토마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시골의 생활 환경에 대한 풍부한 실질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서 묘사된 농촌 생활에 대한 꾸밈없는 묘사는 특히 현실적이었다. 바이에른 방언은 게오르크 퀘리의 작품만큼이나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다.4. 2. 사회 비판
토마는 자신의 작품에서 당시 만연했던 위선적인 도덕성을 드러내려 했다. 그는 또한 부르주아 계층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Pickelhaube' 군국주의를 가진 광적인 프로이센주의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는 또한 바이에른 왕국 시대의 지방주의와 성직자 정치를 혐오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 ''요제프 필서의 서간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유머와 풍자로 양념된 이야기나 상부 바이에른의 시골 및 소도시 환경을 그린 그의 단막극은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의 소설에서 묘사된 농촌 생활에 대한 꾸밈없는 묘사는 특히 현실적이었는데, 이는 토마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시골의 생활 환경에 대한 풍부한 실질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 방언은 게오르크 퀘리의 작품만큼이나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다.[39][41]4. 3. 정치적 변화와 논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루트비히 토마는 좌파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사회, 교회,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태도는 급격히 변화했다. 그는 전쟁에 대한 열광적인 분위기에 동참했고, 1915년에는 의무병으로 자원하여 바이에른 사단 소속으로 동부 전선의 갈리치아에 참전했다. 그곳에서 이질에 걸려 심각하게 앓은 후 군 복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35] 1917년에는 ''미스바허 안차이거''에 전쟁 채권 구독을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며 "우리 조국은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35] 같은 해 7월, 그는 타협 없는 승리를 옹호하는 독일 조국당에 가입하여 뮌헨의 뢰벤브로이켈러 등에서 조국당을 위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36]1918년 11월, 전쟁 패배를 앞두고 토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1918년 여름, 토마는 유대인 스파클링 와인 가문인 페이스트-벨몬트 출신의 마이디 리버만 폰 발렌도르프(1883–1971)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열망했지만, 그녀의 남편이 이혼을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5. 유산
토마는 오늘날에도 바이에른 상부 지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예를 들어, 호프브로이하우스 베르히테스가덴(Hofbrauhaus Berchtesgaden)의 '루트비히 토마 맥주'(Ludwig-Thoma-Bier)와 같은 제품들이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뮌헨의 시립 루트비히 토마 중학교(Realschule)는 1973년 개교 이후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다하우에는 루트비히 토마 학교(초등학교)가 있다. 프리엔 암 킴제(Prien am Chiemsee)에는 1876년부터 토마와 그의 어머니가 살았던 레스토랑에 루트비히 토마 김나지움(Gymnasium)이 있다. 또한 트라운슈타인(Traunstein)에도 루트비히 토마 초등학교가 있다. 다하우-알토뮌스터 철도(Dachau–Altomünster railway)는 '루트비히 토마 반'(Ludwig-Thoma-Bahn)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흉상(bust (sculpture))은 뮌헨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Munich))에 있다.
뮌헨시는 1967년부터 그를 기리는 루트비히 토마 메달을 수여했으나, 그의 민족 보수적 태도, 반유대주의 구호, 반사회주의적 논쟁이 알려진 후 1990년에 수여를 중단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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